마리우스

교양 2008. 4. 28. 23:55

마리우스의 일생

n기원전157년—아르피눔에서태어남

n기원전134년—히스파니아에서복무

n기원전120년—호민관당선

n기원전116년—법무관당선

n기원전114년—히스파니아지방의총독으로파견

n기원전110년—율리아와결혼(율리우스카이사르의고모)

n기원전109년—메텔루스의부관으로군무에복귀

n기원전107년—첫번째집정관직

n기원전107년—구제개혁단행(마리우스의개혁)

n기원전104년~기원전100년—다섯번의집정관직연임

n기원전101년—게르만부족의침입을성공적으로막음

n기원전91년~기원전88년—동맹시전쟁으로군무에복귀

n기원전87년

술피키우스 루푸스와 거래하여 미트라다테스 6세 정벌군의 사령관으로 뽑힘

술라가 로마 진격에 성공, 정권을 잡음. 마리우스와 아들은 아프리카로 도망

킨나와 함께 새로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돌아와 다시 정권을 잡고 대대적 숙청단행

n기원전86년

일곱 번째 집정관직

1월 13일 죽음

가이우스마리우스(157-86BC)

n아르피눔(오늘날의아르피노)태생. 평민계급출신

n귀족출신도아니고로마시민권자는맞지만로마출신도아닌인물

n콘술(집정관)을7차례지낸(BC107,BC104~100,BC86)로마의 장군·정치가.

n군사적으로성공한인물이자신의옛군대병사들의지지를기반으로얼마만큼의정치적성공을거둘 수 있는가를 실증한 최초의 로마인

n군대에입대하여일반사병부터시작하여백부장에서장교에이르게됨

그 무렵 누미디아(북아프리카 카르타고 근방)에서 왕권다툼이 일어나고 그 전쟁에 마리우 스는 종군하게 됩니다.사령관은본래집정관이이끄는데마리우스는사령관이아닌일개부관급으 로 출전

이 왕권 다툼 전쟁은 의외로 시간을 길어지게 됨. 사실로마와는별상관없는전쟁이고왕권반 란을일으킨당사자인왕자는로마와적대시하지않음

집정관에 욕심이 있던 마리우스는 휴가를 신청했고, 휴가를 받은 그는 로마에 도착하게 되 고, 집정관에 당선

그 당시의 로마의 문제점

1.군대징병시기가길어짐에따라본래주업에종사하지못하여군대의사기가떨어졌다는점입니다.(군대간사이에마누라는도망가고농토는황무지가되고등의문제점)

2.로마인구가늘어남에따라서엄청난실업자들이생겼습니다.자식밖에가진것이없다는프롤레타리아(무산자)집단이늘어났고그들을먹여살리지못하면폭동을일으킬염려도있었습니다.

마리우스의 선거공약

1.누미디아문제의 조속한 해결과 군제개혁

2.군제개혁

징병체제의 군단 → 모병체제의 군단

주업에 종사해야 하는 하층민들은 마리우스의 징병제폐지를 지지하게 됨

부족한 군대를 직업화하여 사람을 모집하여 무산자계급에 속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원 하여 실업률은대폭하락하고무산자들도마리우스를지지하게됨

귀족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면서 문제를 해결하여 귀족들도 마리우스를 지지하 게 됨

결국 마리우스는 다수의 지지를 업고 집정관이 됨.

Marius의 군제개혁 이전의 군단

군단병에는 네가지 다른 형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Hastati&Principes: 중무장보병으로 칼 한 개와 두 개의 투창(Pillum)이

기본무장이었다. Hastati가 맨 앞에 섰고 Principes는 두 번째였다.

Triarii: 이들은 베테랑들로 군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투창대신에 이들은

긴창을 들고 있었다. "Res ad triarios rediit" (이제는 트리아리가 나설 차례이다)라는 말로 로마인들은 최악의 상황을 말하곤했다.

Velites: 이들은 사수들이었다. 기본무장은 투구와 방패 그리고 갑옷은 입지 않았다.

일명 경무장 보병들로 지칭되는 사람들인데, 칼로 싸우고 짧은 거리에서 가벼운 투창을 던지는 것이 주임무였다. 보통의 군단은 4200명이었고 5000명까지 늘어날 수 있었다. 60개의 단위(백인대)로 나뉘어져 있었고 2개의 백인대는 한 개의 Manipel을 구성했다. Hatati,Principes 그리고 Triarii는 각각 10개의 Manipel을 구성했다. 그리고

이곳에 Velites가 적당히 나뉘어졌다.

Manipel: 90 Milites

Manipel을 지휘하기 위해서 군단은 30명의 백인대장(Centurio)를 선발했다. 그리고 이

선발된 백인대장은 각각 한명씩 백인대장을 임명했다. 각 백인대장은 부관(optio) 와

다른 장교를 임명했다. 다른장교는 기수(signifer)한명, 나팔수(cornicen)한명, 그리고 tesserarius(매일 밤마다 tessera(작은 왁스로 발라진 판;글쓰는데 사용되었다)에

쓰여진 구호를다른 동료들에게 전달하는 역할)한명이었다. 거기다가 각 군단에는 유산계층에서 선발된 300명의 기병(30기마다 10turmae로 3중대씩)이 배치되었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 징병체제의 군단 → 모병체제의 군단

▶ 군단의 총원을 6000명의 군단과 그에 맞먹는 수의 보조병auxiliarius으로 구성

▶ 군대의 중심은 100명으로 구성된 백인대 Centuria

▶ 6개의 백인대가 모여서 만들어진 전술단위인 대대 cohort,

▶ 10개의 대대로 형성되는 전략단위인 군단 Legion이 중심이 되며,

보조병 및 기병은 동맹국의 파견 병력으로 편성

▶ 백인대의 장 centurion은 병사들과 같은 출신의 노련한 소대 지휘관

▶ 대대장은 선출된 시민 중에서 노련한 정치가 (전직 집정관 또는 전직법 무관급의)가

지휘함

▶ 군단의총사령관은원로원계급

Numidia의 Jugurtha 그리고 Cimber와 Teuton족과의 싸움에서 로마는 점점 더 많은 양의 군대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5번 연속으로 집정관에 당선되고 있던 당시의 마리우스는 (C. Marius 156-86 B.C) 그때까지 유산계급에만 허용했던 군대를 시민권을 가지면 재산에 관계없이 모든 지망자를 군대에 보낼 수 있는 형식으로 개혁하기에 이른다.

그로 인하여 빈자들(Proletariat)은 모두 군대로 몰렸다. 이들은 빨리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되도록 이면 오래 동안 군대에 남아서 급여와 의식주 문제의 해결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로써 로마군대는 징병제에서 용병제로 전환되어지게 된다. 마리우스는 게다가 군단을 재편성하기에 이른다. 그는 Manipel까지의 아래 부분은 그대로 두지만 이 Manipel을 독자적으로 전술을 수행할 수 있는 단위인 600명의 중대로 결합시킨 것이다. 군단의 총 사령관은 원로원 계급의 Legat (군단장)가 맡았다. 그리고 Cohort의 지휘관으로는 원로원이나 기사계급에서 선발된 6명의 호군관 (Tribuni Militum)이 있었다. 역시 군대의 중심은 백인대장 (Centurio) 였다. 아주 복잡한 승진을 통해서 이들은 Primipillus (제1 Cohort의 제1 백인대장) 이 될 수 있었다.

한 군단에는 59명의 백인대장이 존재했다. (제1 Cohort는 백인대장이 5 명뿐이었다.)

그 외에도 로마 군대에는 특별한 지침을 수행하며 평시에는 군인의 임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수많은 Immunes들이 있었다. Praefecti Equitum은 기병대장으로 번역이 되는 독자적으로 운영되던 기병대의 대장이었다.

Preafectus Fabrum은 본래는 공병대의 대장이었으나 개혁을 통해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고 총사령관의 참모로 승진되게 된다. Preafectus는 본래 모든 선임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시대가 되면서 이 명칭은 특히 군대의 분야에서 많이 사용되어지기에 이른다. 카이사르는 모든 군단장들을 지칭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호군관을 지칭할

때 사용하기도 하는 등 일반 지휘관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일반 명사화되어버린 것이다. 최고 사령관은 모든 지휘관들에게 이런 명칭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호군관은 보통 원로원이나 기사계급의 대부분 군사적으로 무지한 어린 자제들로 구성되었으며, 보통 이들은 이 자리를 이후 정치에 입문하기 위한 발판으로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는 않았다. 이들 중 2명은 한달동안 내무를 보았고 나머지는 다른 특별한 임무들이 주어지곤 했다 (정찰, 외교보좌 등). 전시에는 가장 로마에서 강력하다고 여겨진 전술적 단위인 Cohort정도의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마리우스와 공화정의 성장과 몰락

▶ BC 107년 귀족과 맞선 호민관과 에퀴테스의 도움을 받아 콘술(집정관)이 되어 누미디아와의 전쟁 지휘권을 받음

▶ BC 105년 승리함. 그에 앞서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이 남부 프랑스로 쳐들어와 로마군을 잇달아 격파해 로마를 두려움 속에 몰아넣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마리우스가 승리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알려졌고, 그는 법의 제한을 뛰어넘어 BC 104년 또다시 콘술이됨

▶ 무산 시민층으로부터 모병해 만든 새로운 군대로 유구르타와의 전쟁에서 승리(BC 104), 킴브리·테우토니족 격퇴에도 성공하여 민중파의 영수로 절대적 권력을 확립함

▶ 게르만족이 이탈리아 공격을 늦추고 있는 동안 그는 콘술로 재선되었고, BC 102~101년에는 마침내 게르만군을 격파함.

▶ 전통적인 징병제로는 병력을 충원하기가 매우 어려움을 깨달은 마리우스는 재산이 있어야만 병사가 될 수 있다는 자격을 무시하고 빈민들 사이에서 많은 의용군을 모집해 병적(兵籍)에 넣음. 동시에 그는 호민관 루키우스 사투르니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퇴역 군인들에게 주둔 지역의 토지를 나눠줌. 이를 통해 인기를 얻은 사투르니누스(BC99년) 는 다시 집정관직에 올라 온갖 폭력과 살인을 저질음.

▶ 마리우스의 선택. 사투르니누스를 편든다면 계속 플레브스와 에퀴테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원로원파가 그에게 이제까지 그의 편이었던 민중파에게서 나라를 구해달라고 요청하자 마리우스는 거절하지 못하고 민중파를 적으로 돌림, 대가는 보잘 것 없어서 그는 플레브스의 지지를 잃었고 위기에서 벗어난 과정에게도 외면당했으며 위신을 크게 잃음. 옛 부하 술라는 더 많은 지지자를 모아 마리우스를 공격함.

▶ 마리우스는 일단 술라의 군대를 격퇴하는데 성공하였지만, 동방에서 귀환한 술라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함으로써 결국 패배함

▶ 로마의 위기를 구하였던 영웅 마리우스는 퇴역병 식민처의 하나인 북부 아프리카 지역으로 도피함

마리우스의 말년

▶ BC87년 술라가 그리스에서 한창 전투를 벌이고 있을 때 로마에서 계속되던 무질서는 결국 콘술인 킨나가 해임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이틈에 마리우스는 에트루리아에 상륙해 군대를 모은 뒤 오스티아를 약탈하고 킨나와 합세하여 로마를 점령했다. 마리우스와 킨나는 모두 BC86년 콘술로 선출되었으며 마리우스에게는 그것이 7번째 였다. 마리우스는 마르쿠스안토니우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푸블리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등 자신에게 배신적인 행동을 했다고 여겨지는 모든 유명 인사들에게 처형 명령을 내렸으며, 이후 끔찍한 학살이 뒤 따랐다. 이때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BC86년 그가 죽자 그의 적과 친구를 비롯해 모두가 그의 죽음을 천행(天幸)으로 여겼다.

▶마리우스의 외아들은 BC82년에 콘술이 되어 술라와 맞서 싸우다 죽었다.

▶부인은 BC69년까지 살았고,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으로 조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 그녀의 장례식에 애도의 연설을 바치는 영광을 누렸다.

▶카이사르는 뒤에 술라가 철거했던 마리우스의 승전기념비를 이후 카피톨리누스 신전에 복원시켜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아프리카의 두 정착촌인 우키마유스와 티바리스를 비롯해 코르시카의 한식민지를 지칭하는 이름인 마리아나와, 론강에 마리우스의 병사들이 판 운하포사마리아나는 모두 마리우스를 기념해 붙인 이름이다

평가

▶로마의 정치자

독일역사가(탁월한 로마사학자이기도 했다)인 몸젠은 평가 마리우스에게는 정치적 교양의 결여가 치명적 이었다

▶로마의 장수.

"조직력과전술력에서장수로서는풍부한재능을가진남자."

Posted by 남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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