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라

교양 2008. 4. 28. 23:56

술라의 일생

기원전 138년 경 – 로마에서 태어남

기원전 107년 –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부관이됨

기원전 106년 – 유구르타와의 전쟁 종결

기원전 104년/기원전 103년 – 마리우스의 부하로 갈리아 정벌 참가

기원전 103년 –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의 부하로 갈리아 정벌 참가

기원전 101년 – 킴부리 부족을 대패시킴

기원전 94년 – 법무관 다선

기원전 93년 – 킬리키아의 총독

기원전 91년/기원전 88년 – 동맹시 전쟁의 장군으로 참가

기원전 88년 – 폼페이우스 루푸스와 집정관 취임

로마로 진격하여 마리우스파 축출

기원전 87년 – 미트라다테스 6세의 정벌에 사령관으로 임명

기원전 86년 – 아테네 공격

기원전 84년 – 소아시아 서부에서 미트라다테스군 격파, 아시아 속주 재조정

기원전 83년 – 이탈리아로 귀환하여 두번째 로마 진격

기원전 82년 – 독재관에 임명됨

기원전 80년 – 독재관 사퇴후 메텔루스 피우스와 집정관 취임

기원전 79년 –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

기원전 78년 – 사망, 로마에서 장례식 거행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138-78BC)

▶ 로마공화정의 영향력 높은 귀족 가문 코르넬리우스 출신.

▶ 코르넬리우스가문은 그가 태어났을 당시에는 몰락하여 정치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하는 상태.

▶ 젊은 시절을 로마의 하층민들과 보냈으며 메트로비우스라는 당대의 배우를 만나 평생

함께 했다고 한다. 비록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내긴 했지만 술라는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했고 훌륭한 교육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어느 파당에도 안 속하고 고집 센 개인주의자

마리우스가 Populares의 편에서 선출되자 원로원 파로 감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 (최초의 사례)

지휘관에 불복종해서 반란 (최초의 사례)

로마에서 내전 시작 (최초의 사례)

그의 정적 살해 -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간신히 도망감

술라는 로마의 제 1인자가 됨

술라가 동방 정복에 나서자 로마에서 반란 이후 로마를 4년간 지배한 자는 귀족 Cinna

술라는 그를 위해 일한 자는 끝까지 보상

* 몰수된 재산은 경매

* 공헌한 노예는 해방 + 현금

술라의 등장 배경

그리스와 아시아에서의 전쟁을 술라가 지휘

Mithridates를 상대로 하여 소아시아에서도 승리

보상금으로 엄청난 재산 얻음; Mithridates와 화해 (기원전 85년)

그러나 그는 로마에 진군할 재정은 없음

마리우스 사망; 술라는 기회를 잡음

술라의 이탈리아 재정복 (83 BC)

83 BC: 이탈리아 정복

82 BC: 로마 시로 진군, 정적 살해

정적 추적을 위해 심복 Gnaeus Pompey를 아프리카로 파견

술라는 폼페이우스에게 "Magnus"칭호 줌

The Proscriptions(살생부) 이탈리아 인 치죄

술라의 경호대 1만 명이 proscribe

명단에 있는 자를 체포하거나 직접 살해한 자는 보상받음

명단에 있는 자의 가솔도 보복 대상

술라의 국제개혁

▶ Dictator부활: 기원전 3세기에 폐지된 dictator(독재자)위치부활

술라는 임기 없음(최초의 선례)

▶ 군대 힘으로 로마국제개정: 로마역사상 최초의 논리적 헌법

▶ 군사개혁: 로마직할령(루비콘강이남)에는 군단을 이끌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군단을 가지는 전직 집정관, 법무관은 반드시 원로원이 결정하게 함

▶ 원로원개혁: 원로원수를 600명으로 하고 권한을 강화함

▶ 복지문제: 가이우스그라쿠스가 시작한 곡물법을 폐지하여 무산계급의 이익을 떨어뜨리 고 식민 도시에 퇴역병을 이주시킴.

▶ 사법개혁: 그라쿠스형제 이후 기사계급으로 구성되던 배심원을 다시 원로원의원으로만 구성함

▶ 호민관개혁 :호민관직에 있는 사람은 다른 관직에 취임할 수 없게 하고 연임은 10년의 휴식기가 있게 함

술라의 말년

▶ 스스로 독재자 직위에서 물러서고, 대신consul이 됨(기원전80년)

▶ Campania로 하야, 1년 후인 기원전 78년에 사망

▶ 많은 피를 요구하였으나 사망 후 군림하기 직전으로 모든 것이 원상 복귀 됨

평가

▶ 친구와 적을 영원히 잊지 않았던 사람

▶ 시계바늘을 뒤로 돌리려 했던 사람

▶ 그의 공포적인 행동으로 로마 사에서 잊혀 지지 않는 사람

▶ 고대와 현대의 여러 문필가들은 "선한의도로 시작했으나 악한행동으로 일을 처리 했던" 술라라고 평가

▶ 현대 학자들의 견해는 술라를 수수께끼의 인물로 보는 관점(그가 사임한 사실 때문에) 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를 군주 또는 성실한 개혁가로 간주하는 시각이 많아짐

원로파 민중파

원로원파

민중파

대표 인물

술라, 키케로

카이사르, 마리우스

정치적인 결정

원로원의 권위가 최우선시

원로원보다는 민회의 결정 우선시

구성

귀족계층

원로원의 일부 기사신분, 기타 평민계층

주요 업무

집정관의 결정에 조언, 충고, 권고의 역활

민리 증진을 위한 사회개혁 활동

원로원파와 민중파가 생겨난 원인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활동에 의한 것으로서 그라쿠스 형제는 민중의 기관인 호민관과 민회를 이용하여 개혁을 시도하다 실패하였으나 이는 후에 민중파가 생겨나게 된 원인이 됨


Posted by 남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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